Category: 문화 생활

  • 순수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 동서문화사, 정명오 옮김.

    즉 그건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감각의 모든 인상으로부터도 독립된 인식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선험(아 프리오리)’적 인식이라고 불리며, 경험적 인식과 구별된다.

    그러나 이 사상을 잘 살펴서 이를 밝히는 편이, 그것을 소용없는 짓이라고 무시하는 것보다 낫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는 것 은 그것을 멸시한 해로운 핑계이다. -284p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합리적 심리학의 유일한 텍스트이며, 이 심리학은 거기서부터 그 모든 지식을 풀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 300p

    모든 반론은 독단전, 비판적, 회의적으로 나눌 수 있다. 독단적 반론은 어떤 명제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판적 반론은 명제의 증명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단적 반론은 명제가 대상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의 반대를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 대상의 본성 상태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단적이며, 문제가 되어 있는 상태를 상대보다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적 반론은 명제의 가치나 무가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상을 더욱 잘 알 필요가 없다. 또는 대상의 보다 더 좋은 지식을 외칠 필요가 없다. 비판적 반론은 변명이 근거가 없음을 나타낼 뿐이지, 그것이 틀렸다는 걸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회의적 반론은 명제와 반대 명제를 같은 중요도를 가진 반론으로 보고, 그 어느 하나도 다른 쪽에 대해서 서로 독단으로서, 또 그것에 대한 반론으러서 대치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반론은 서로 대립하는 양쪽에서 겉보기에는 정설적이며, 그래서 대상에 대한 모든 판단을 완전히 무효로 만든다. 따라서 독단적 반론도 회의적 반론도, 대상에 대해서 무언가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주장할 만한 대상에의 통찰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판적 반론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효과가 없고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을 가정하고 있다. 단순히 나타내어 이론을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이론에서 부당한 기반으로 걷어내고자 하지만, 대상의 상태에 대해 특별히 무언가를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327p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묻게 될 것이다 “현명하고 전능한 유일한 세계 창조자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와 같은 세계 창조자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경우, 우리는 가능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그것이 자체로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단순한 초월적 대상)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을 연구할 때에 전제해야만 하는 세계 구조의 체계적이고 합목적적인 질서와 관련하여, 저 알 수 없는 존재자를, 다만 지성(경험적 개념)과의 유추로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존재자에 근거를 둔 목적이나 완전성과 관련하여, 우리 이성의 조건에 의해, 이와 같은 체계적 통일의 근거를 포함할 수 있는 특성을 그 존재자에게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념은 전적으로 우리 이성 세계에 사용되는 관계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념에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런 존재자가 전적으로 이념에서 사유되는 존재자일 뿐임을 망각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계의 고찰에 의해서는 전혀 규정되지 않는 기초에서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원리를 경험적인 이성 사용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524p

    철학에서는, 단지 단순한 실험이나 가정의 경우 이외에는, 수학을 모방해 정의를 앞에 내걸어서는 안 된다. 철학적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주어진 개념을 분해하는 것이므로, 선행하는 것은 이들의 개념-비록 아직 혼란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이며, 불완전한 해명이 와넌한 해명에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한 해명에 이르기 전에, 즉 정의에 이르기 전에 아직 불완전한 분석에서 이끌어 낸 몇 가지 특징으로부터 상당한 것을 미리 추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철학에서는, 정확하고 명로한 정의는 작업의 시작보다는 오히려 작업의 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546p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확실하다’고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되고, ‘도덕적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즉 신과 내 세에 대한 믿음은 나의 도덕적 심정에 들어 있는 것이며, 그것 때문에 내가 도덕적 지향을 상실한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그 믿음을 빼앗길 걱정도 없는 것이다. -606p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업을 완성시킨다는 것, 즉 순수이성에 입각한 모든 인식의 건축술을 설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작업을 우리 인식능력의 공통된 뿌리가 나뉘어 두 개의 줄기로 자라나는 곳에서 시작할 것이며, 그 한 줄기가 이성이다. -610p

    만약에 독자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 작은 길을 큰 길로 만들기 위해 기울여준다면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이 현 세기가 끝나기 전에 달성될 수 있을지 독자들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이성의 지식욕이 늘 다루어 왔으나 헛수고로 끝난 일에서, 인간 이성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말이다. -622p

    그리고 중요한 것은 칸트가 학생을 향해 끊임없이 되풀이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사상을 단순히 입으로 흉내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645p

    그의 도덕설은 ‘행복의 추구’를 도덕의 원리로 삼아서는 안되고, ‘행복을 누리기에 적합할 것’을 첫 번째 의무로 삼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부, 지위, 명예 같은 이 세상의 행복은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를 다한 결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뜻에 의해 적합하게 부여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적합하지 않은 행복이나 지위에 있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했다. – 646p

    ‘뉴턴이나 라이프니츠조차도 진리에 방해가 될 듯한 경우에는 솔직히 무시해도 지장이 없다. 자기 지성 이외의 어떠한 설득에도 따라서는 안 된다.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것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 649p

    ‘더 자주, 또 더 오랫동안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큰 감탄과 경외감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라는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말이야말로 칸트 철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 658p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참된 철학의 문제로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 번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고, 두 번째는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이며, 세 번째는 ‘나는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이다. 말할 것도 없이 첫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과제였다. -700p

  • 카사블랑카

    1942년 영화 카사블랑카.

    세상에 결말이 그게 뭐야. 지금 똑같은 결말로 영화를 만든다면 작가가 대충 썼느니, 감독은 뭐하냐 등등의 소리가 나올 것 같다. 극적 반전(?)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 시민 케인 CITIZEN KANE

    매우 유명한 영화라고 하길래 구해서 봤다.

    일단 이 영화가 1941년에 상영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보는게 좋을 듯 하다.

    막대한 부자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던 케인이 주위에 아무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영화에서 보여준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에서 우연한 기회에 엄청난 부를 얻게 되자 엄마가 케인을 도시로 보낸다. 그 이후 신용 관리 담당자(?)에게 반항기를 보여 그 신문사도 인수해 버린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필요해서 어떠한 행동을 한다. 2번째 아내에게 오페라 하우스를 선물하는 것도 자기가 필요해서. 정작 2번째 아내는 꿈을 이야기 했을 뿐 실제로 사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 자기가 원하면 원하는 것을 해야하며, 그러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관심도 없다. 첫 째 부인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면서 케인은 본인의 회사인 인콰이어 신문을 1번째 아내는 경쟁사인 크로니큭 신문을 본다. 대비가 재미있다.

    수잔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좋다. 물론 케인도 연기가 좋다.

    케인이라는 사람에 촛점을 맞추면 나름 볼만한데, 기법이나 철학 같은거에 초점을 맞추면 재미없을 것 같다.

    그런데 케인은 ‘시민’이라고 하기엔 너무 안맞는 표현 아닌가?

  • 칼 비테의 교육법

    조금만 더 일찍 교육을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요람에서부터 교육을 시작한다면 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교육은 평범한 아이도 비범하게 바꾼다.

    어리석은 부모와 보모가 아이에게 허락하는 불분명한 말, 그러니까 아이가 쓰는 말을 우리 집에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소를 ‘음매’, 양을 ‘매애애’, 고양이를 ‘야옹이’, 개를 ‘멍멍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소, 양, 고양이, 개’라고 말해야 했다.

    우리는 단어의 의미 하나하나를 살려서 항상 바르게 말했다.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문장이나 표현을 신중하게 피했다.

    경험은 그토록 중요하다. 아이가 많은 사물을 일찍이 접하고 명칭과 특성에 익숙해지고 관련된 모든 것을 쉽고도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른의 모든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길에서 노는 것이 위험하다고 해도 나는 아이를 언제나 방구석에 앉아 있게 하기보다는 길에서 뛰놀게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진정한 칭찬은 길게 하지 않는 법이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들의 아이들을 교육받는 부모의 아이들과 아무 준비없이 어울리게 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훌륭하게 교육받은 아이의 덕성은 형편없이 교육받은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 반면, 형편없이 교육받은 아이들의 약점은 훌륭하게 교육받은 아이들을 쉽게 파고든다.

    아이들이 설탕과 과자에 맛을 들이면 소박한 음식에 무관심해진다.

    우리 부부 중에 한 쪽이 칼의 실수를 간과하거나 칼의 응석을 받아주었다면 다른 한 쪽이 크게 나무랐다.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 격렬하게 대하는 것보다 더욱 잘못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둘 다 위험하다.

    크고 분명하고 진지하게 아닌 것은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어떤 것은 아이들과 절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안다. 반면 어떤 것은 아주 조심스럽게 조건부로만 이야기해야 한다. 또 어떤 것은 아이들이 자기 의견을 형성하고 표현할 때까지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옳은 것은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내 기본 원칙이 첫째, 칼이 배우고 싶어 해야 하고 둘째, 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하고 셋째, 가장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내 아들은 늘 최대한 집중했고 조금만 필기했다. 대신 강의를 따라가고 완전히 익히려고 했다.

    아무리 수업이 즐거워도 노는 것과는 엄격히 분리했다.

    우리는 칼이 착한 행동을 해도 금전이나 값진 물건으로 보상해주지 않았다. 성취감, 스스로 극복했다는 기쁨, 우리의 애무, 칼의 성스러운 ‘윤리 기록장’에 담긴 짧은 기록, 친구들의 커다란 호의, 신이 칼을 더욱더 사랑하고 칼이 더욱더 선행을 이룰 힘을 지녔다는 확신, 칼의 눈 앞에서 보여주었던 선행의 유익한 결과 같은 것들이 보상이었다.

    우리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엄하게 대했다. 실수는 아주 진지하게 슬퍼하며 나무랐다. 모욕한 사람은 누구라도 아주 경멸했다.

    나는 보상이 단순한 지불로 넘어가면 쉽게 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종종 칼이 자기 소유물, 재산, 이익에 관심을 갖게 했다.

    칼이 힘껏 그리고 즐겁게 공부했더라도 더욱 높은 윤리 법칙을 위반했다면 돈을 받지 못했다.

    ‘훔치다’는 ‘낚아채다’로, ‘거짓말하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다’로, ‘게으른’은 ‘부지런하지 않은’으로 표현하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엄청나게 해롭고 교육에서는 더욱 해롭다. 매력적인 옷을 걸친 악이 가장 위험하다.